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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도로 이어지는 한강의 낭만적 보행교, 서울의 다음 유산을 짓자
1. 넉넉한 위로를 주는 한강, 우리는 그곳을 온전히 걷고 있는가?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 한가운데, 폭이 1킬로미터에 이르는 강이 굽이쳐 흐른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고도 반가운 축복이다. 문득 일상이 소란해질 때면 이따금 강변으로 나가 조용히 걸음을 옮긴다. 말없이 곁을 내어주는 넉넉한 물결과 서늘한 강바람을 마주하다 보면, 어느새 귓가를 때리던 도시의 소음은 잦아들고 복잡했던 마음에 잔잔한 윤슬이 일곤 한다. 이토록 깊은 위로를 건네는 한강은 이제 우리만의 쉼터를 넘어 세계인이 주목하는 공간으로 나아가고 있다. 세계적인 고등교육 평가기관 QS가 발표한 ‘2026 세계 대학생 도시’ 순위에서 서울이 1위에 올랐다. 런던과 파리, 도쿄 등 유서 깊은 도시들을 제치고, 세계의 청년과 인재들이 배우고 일하며 머물고 싶은 도시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K-팝과 K-드라마에서 시작된 문화적 호기심이 이제 서울의 라이프스타일과 도시 경험 그 자체를 향한 관심으로 확장되고 있다. 그러나 찬란하게 빛나는 한강의 물결 앞에 서면 묵직한 질문 하나가 되돌아온다. 우리의 도시는 기꺼이 찾아온 세계의 청년과 방문객들을 오래 품어주고, 깊은 영감을 불어넣을 ‘다정한 공간’을 충분히 내어주고 있는가.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는 어렵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대부분의 교량은 여전히 자동차와 철도 등 빠른 이동을 우선하는 교통시설의 성격이 강하다. 교량 가장자리에 보행로가 마련되어 있기는 하나, 매연을 뿜으며 쌩쌩 달리는 차량의 소음과 긴장감 속에서 그 길은 ‘산책’이라기보다 아슬아슬한 ‘통과’에 가깝다. 지금 서울에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차가운 토목 구조물이 아니다. 사람이 공간의 주인이 되어 멈춰 서고, 사색하며, 예술과 문화를 호흡할 수 있는 다리다. 자동차의 속도에서 벗어나 사람의 시간을 되찾아줄 새로운 철학이 이제 한강의 물결 위에 쓰여야 할 때다.
2. 까를교, 폭력을 견뎌낸 다리가 어떻게 도시의 영혼이 되는가?
보행교가 도시의 삶을 얼마나 경이롭게 바꿀 수 있는지 이해하려면 잠시 유럽의 오래된 강변으로 눈을 돌려볼 필요가 있다. 체코 프라하의 블타바강을 잇는 까를교(Charles Bridge)는 다리가 단순한 연결 통로라는 1차원적 기능을 넘어, 그 자체로 목적지가 되고 도시의 영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14세기에 건설된 약 516m 길이의 석조 다리에 발을 내딛는 순간, 사람들은 시간을 거슬러 중세 유럽의 한복판으로 들어선 듯한 감각을 경험한다.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돌바닥의 묵직한 질감, 난간을 따라 도열한 30개의 성인(聖人) 조각상, 블타바강을 바라보는 풍경이 어우러져 거대한 야외 미술관을 완성한다. 무엇보다 까를교의 힘은 살아남은 시간에 있다. 수백 년의 전쟁과 홍수,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까를교는 오늘까지 살아남았다. 그 위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은 이 다리를 단순한 교량이 아니라 프라하의 역사와 기억, 자존심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자동차의 경적 대신 사람들의 낮은 웃음소리와 거리 음악가들의 선율이 흐르는 이 다리는, 오롯이 사람에게 공간을 내어줄 때 도시가 얼마나 우아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프라하의 까를교와 파리의 퐁데자르(Pont des Arts) 같은 보행 중심의 다리는 자동차의 통행에서 벗어나 오롯이 사람에게 공간을 내어줌으로써 ‘천천히 걷는 도시’의 매력을 보여준다. 다리는 강을 건너기 위한 시설일 뿐이라는 생각을 넘어, 다리 자체가 도시의 목적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들은 보여준다.
3. 과거의 낭만을 잃어버린 서울, 미래 세대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까를교의 기품 있는 풍경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서울을 돌아보게 되고, 가슴 한편이 뻐근해진다. 만약 식민지배와 전쟁,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개발의 과정에서 서울의 옛 풍경을 조금 더 온전히 지켜냈다면 어땠을까. 구불구불한 골목길과 기와지붕이 이어지는 사대문 안의 풍경, 성곽과 옛길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한양의 도시경관이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말이다. 자연과 역사가 겹겹이 쌓인 옛 서울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면, 지금의 서울은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역사문화도시로서 더욱 강력한 정체성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엎질러진 물을 되담을 수는 없다. 도시의 효율과 팽창을 좇는 과정에서 우리는 정겨운 골목과 오래된 도시경관의 상당 부분을 잃었고, 그 자리를 아파트와 콘크리트 구조물이 대신했다. 그렇다고 과거의 상실을 한탄하는 데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다. 옛것을 잃었다면, 미래 세대가 100년 뒤에도 찬탄하며 걸을 새로운 유산을 지금부터 치열하게 빚어내야 한다. 과거의 유산을 모두 지켜내지는 못했지만, 미래의 유산은 우리가 만들 수 있다. 4. 마포에서 선유도로 이어지는 낭만, 그 담대한 공간의 궤적 그렇다면 서울의 새로운 보행 랜드마크는 어디에 놓여야 할까. 나는 그 출발점으로 청년문화가 살아 숨 쉬는 마포에서 생태와 시간의 흔적을 품은 선유도로 이어지는 낭만의 궤적을 제안하고 싶다. 과거 마포나루를 중심으로 물류와 사람이 오가던 마포 일대는 오늘날 홍대와 합정으로 이어지며 청년문화와 예술, K-컬처가 살아 숨 쉬는 역동적인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반면 한강의 선유도는 폐정수장의 산업유산을 품은 채 생태공원으로 재생된 치유와 회복의 공간이다. 낡은 콘크리트 구조물 사이로 식물이 자라고 물이 흐르는 선유도는 산업의 흔적과 자연의 회복이 공존하는 서울의 ‘시간의 정원’이다. 이 가장 역동적인 도심에서 가장 고요한 생태의 섬으로 이어지는 물길 위에, 오직 사람만을 위한 가칭 ‘선유교(신선다리)’, 곧 마포와 선유도를 잇는 보행 전용 인도교를 세운다면 어떨까. 이 다리는 마포의 번잡한 속도를 늦추고 걷는 이를 자연과 사색의 세계로 안내하는 ‘서울의 문’이 될 것이다. 상상해보자. 젊음의 에너지가 넘치는 마포 쪽 둔치를 뒤로하고 다리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차 소리는 조금씩 멀어진다. 발밑으로 한강의 물결이 흐르고, 강물이 찰랑이는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다리 곳곳에 마련된 작은 쉼터에서는 청년 예술가들의 음악이 흐르고, 노을빛으로 물든 한강의 윤슬 앞에서 사람들은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도시에서 자연으로, 속도에서 사색으로, 일상의 소란함에서 생태의 고요함으로 건너가는 전이의 공간. 그것이 선유교가 지향해야 할 본질이다. 5. 한강 보행 랜드마크를 완성할 네 가지 공간 혁신 이 감수성 짙은 비전을 흔들림 없는 도시 경쟁력으로 구현하기 위해 네 가지 과제를 제안한다. 첫째, 100년의 세월을 품어낼 예술적 디자인을 입혀야 한다. 당대의 얄팍한 유행을 좇는 가벼운 조형물을 경계해야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품이 깊어지는 재료와 구조를 선택하고, 한국 고건축의 유려한 선과 전통 공간의 여백을 현대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국내외 건축가와 도시디자이너, 조경가, 예술가가 참여하는 국제설계공모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프라하의 까를교처럼 시간이 덧입혀질수록 가치가 깊어지는 다리, 오늘의 랜드마크를 넘어 100년 뒤 서울의 유산으로 기억될 다리를 만들어야 한다. 둘째, 다리 위를 살아 숨 쉬는 ‘K-컬처 플랫폼’으로 만들어야 한다. 인접한 마포·홍대의 풍부한 문화적 역량을 선유교 위로 끌어올려야 한다. 소규모 버스킹 무대와 야외 전시 공간을 입체적으로 엮어 K-팝과 인디음악, 국악과 미디어아트가 한강의 풍경과 어우러지게 한다면, 걷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문화 경험이 될 수 있다. 낮에는 청년 예술가들의 무대가, 밤에는 절제된 빛의 예술이 한강의 물결과 만나는 공간이다.선유교를 ‘한강 위의 K-컬처 플랫폼’으로 만드는 것이다. 셋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무장애(Barrier-Free) 보행 네트워크’를 완성해야 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다리라도 누군가에게 장벽이 된다면 그 의미는 퇴색한다. 마포 쪽 지하철역과 수변공간에서 시작해 보행교와 선유도 내부까지 가능한 한 단차와 계단 없이 이어지는 보행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휠체어와 유모차, 어르신의 지팡이가 물 흐르듯 이어지는 길.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보편적 다정을 공간에 설계해야 한다. 넷째, 수변경제와 도시복지를 틔우는 따뜻한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매력적인 보행교는 스쳐 지나가는 통과 지점이 아니라 기꺼이 머무는 목적지가 될 수 있다. 선유도를 찾은 발길이 자연스럽게 마포의 문화공간과 수변 상권으로 이어진다면 새로운 체류형 관광과 지역경제의 활력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적 효과만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 도심 한복판에서 시민 누구나 돈을 내지 않고도 최고 수준의 수변 풍경과 자연, 예술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 그 자체가 21세기 서울이 시민에게 제공해야 할 새로운 도시복지다.
6. 자동차가 질주하던 한강에서, 사람이 걷고 사랑하는 한강으로
과거의 서울은 많은 것을 잃었다. 그러나 상실감에만 발목 잡혀 있을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전 세계를 매혹시킨 문화적 역량이 있고, 그 찬란한 문화를 품어낼 넉넉한 한강이 흐르고 있다. 산업의 흔적을 생태의 공간으로 바꾸어낸 선유도도 있다. 마포에서 선유도로 이어지는 한강 위에 서울만의 까를교를 짓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보행교를 더 건설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효율과 팽창을 우선했던 산업도시에서 벗어나, 사람과 자연, 문화와 기억이 다정하게 손을 맞잡는 인간적인 도시로 나아가겠다는 선언이다. 매연을 뿜으며 자동차가 내달리던 한강에서 사람들이 어깨를 맞대고 천천히 걷는 한강으로. 무심히 강을 건너기만 하던 다리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서울을 바라보며 예술과 자연을 만나는 다리로. 언젠가 서울을 찾은 세계의 청년들이, 그리고 일상에 지친 우리의 이웃들이 마포에서 선유도로 이어지는 이 아름다운 인도교 위에서 서늘한 강바람을 맞으며 이렇게 속삭이는 날을 꿈꾼다. “서울에는, 서울만의 까를교가 있다.” 우리가 옛 유산을 모두 지켜내지는 못했을지언정, 미래의 유산은 지금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다. 100년 뒤의 사람들이 기꺼이 걷고 싶어 할 다리, 세계의 청년들이 서울을 기억하게 될 길, 시민 누구나 자연과 예술을 누릴 수 있는 공간. 서울의 다음 100년은 그런 다정한 길 위에서 시작되어
김형태 학교 안전정책포럼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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