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등포 사람들-청암 전영각] “붓은 14살에 만난 나의 또 다른 인생이다”
  • 입력날짜 2016-07-26 10: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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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만 주어지면 재능기부로 후학 양성하고 싶다!”
“자치단체나 뜻있는 독지가가 나서서 작은 공간이라도 만들어준다면 건강이 허락하는 한 재능기부를 통해 서예 후학을 양성하고 싶다.”, “고향에 오래된 집이 있다. 이곳을 수리해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삶의 흔적인 서예에 관한 자료를 보관하고 싶다. 물론 지금까지 그랬듯이 후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자료는 기증 처가 생기면 기증하고 나머지 자료들을 말하는 것이다.”

7월 13일(수) 영등포동 6가에 있는 청암 서예연구원에서 만난 전영각 선생과의 인터뷰에 앞서 지금 현재의 소원과 앞으로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냐는 질문에 숨 돌릴 틈 없이 돌아온 답이다.

전영각 선생과의 인터뷰는 이렇게 서론 없이 이어졌다.

전영각 선생은 영등포구 서예협회 회장을 역임한 서예 원로로서 “요즘은 서예를 전문적으로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저렴한 비용으로 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즐기는 것으로 끝내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나마도 반겨야 하는 상황이 서예계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며 한숨과 함께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공간만 주어진다면 후학 양성을 위해 스스로 재능기부에 나서겠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 전영각 선생은 “서예로 한글과 한문을 각각 5체(궁서체, 정자 흘림체, 판본체, 목간체, 서간체)로 쓸 수 있는 사람은 우리나라 전체 인구 중 50여 명이 채 안 된다. 아쉽게도 우리 영등포에도 저 한 사람뿐이다”며 서예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점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냈다.
“붓은 14살에 만난 나의 또 다른 제2의 인생이다”며 서예인으로서 자긍심을 나타낸 전영각 선생은 1982년 한국노동문화협회 창립, 1992년 영등포 예술인총연합회 창립, 1996년 정보통신문화회 창립, 영등포 서예협회 창립 등 문화 예술계에 남 못지않은 발자국을 남겼다.

1982년 창립한 한국노동문화협회는 노동자와 문화를 연계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당시 노동부가 주최한 노동문화제에 참가한 분야별(서예, 사진, 공예, 미술, 문학) 수상자 12명을 모아 그해 11월 11일 첫 발기인 대회를 열고 창립한 한국노동문화협회는 현재 250여 명의 회원이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매년 노동문화제를 개최해 문화인구의 저변 확대에 이바지하고 있다.

각종 대전에 참여해 금상, 은상 동상, 특선, 입선을 모두 받은 전영각 선생은 가장 기억에 남는 공모전과 수상내용으로 전국 공무원만 참석할 수 있는 ‘공무원 미술대전’에서 받은 총무처장관상(2회), 행정안전부장관상(2회)을 꼽았다.

전영각 선생은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서예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당시 격일제로 근무하는 직장의 특성을 살려 지역에 있는 모 서예학원에 등록해 10여 년을 다니며 서예 공부에 전념했다. 전영각 선생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당대의 실력자인 남천 유창수 선생(한문 수학), 소당 이덕수 선생, 송석 정재흥 선생, 한별 신두영 선생, 늘샘 권오실 선생을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았다.

우리나라의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19대 박근혜 대통령까지의 취임사를 모두 붓글씨로 써서 소장하고 있으며 이는 100여 페이지 분량 5권에 이른다.

전영각 선생의 지역에 대한 애정과 서예를 통한 봉사활동 또한 남다르다.
2005년 세례를 받은 직후부터 시작한 대림동 성당 서예봉사는 2015년(작년)까지 이어왔다. 10년 동안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이어온 봉사활동을 멈춘 것은 “밤바람으로 인해 영향받는 건강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도 자신들이 가진 재능을 이웃과 사회, 국가를 위해 기부하는 문화가 더 많이 형성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힌 전영각 선생은 이북5도민대회 가훈 써주기, 영등포구청에서 매년 3월에 개최하는 새봄맞이 가훈 써주기, 영등포문화원 단오축제 가훈 써주기 등 크고 작은 봉사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2시 이후에는 꼭 청암서예연구원에 나와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다”고 밝힌 전영각 선생은 신길5동, 문래동 주민자치센터와 영등포문화원 등에 강의를 나가면서도 네 권의 책<궁체고문 정자흘림 농가월령가(2015년), 시선집(2013), 목판 글씨 농가월령가(2011년), 국·한문 혼용으로 쓴 판본을 찾아서(2009년)를 출간해 후학들에게 큰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지역의 원로로서 쉬지 않고 활동하며 후학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전영각 선생은 가장으로서의 점수는 어떨까?

스스로 매긴 점수를 묻자 “(한숨을 몰아쉰 후) 가장으로, 두 아들의 아버지로서의 점수는 빵점이다. 오죽했으면 최근 집을 돕겠다는 의미로 ‘우당’(도울‘祐’, 집‘堂’)이라는 호를 하나 더 만들었겠는가”라고 반문한 전영각 선생은 “사회에서 인정을 받는 것이 꼭 인생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라는 말로 부인과 아이들,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전했다.

“일정 정도의 공간만 만들어지면 힘이 닿는 날까지 후학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고 싶다”며 재능 기부 확산 문화를 강조하고 “일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아쉬운 것은 노동문화회관을 건립하지 못한 것”이라고 밝힌 전영각 선생은 충청남도 청양 출신으로 김신조 사건이 터진 1968년에 제대했다.

현재는 영등포구 당산동 한 아파트에서 3대가 모여 사는 전영각 선생은 “영등포구에 거주하는 구민이 현판, 지석 등에 대한 글을 부탁해오면 써줄 예정이다”는 말을 끝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전영각 선생과의 인터뷰는 7월 13일과 20일, 2회에 걸쳐 청암 서예연구원에서 진행됐다.

박강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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