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탐방- 신길도당]신기리 향우회, 마을의 편안과 국태민안 위해 도당제 올려
  • 입력날짜 2017-04-26 11: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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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의 당주 집에서 시작, 집사 도움 받아 제의 거행
-영등포구 문화재 지정 검토해야!
도시 지역의 변모된 공동제의의 모습을 보여주는 마을제의가 있다.

마을에 거주하고 있던 타지로 이주했든 같은 마을을 성장 배경으로 하는 사람들이 모여 마을 공동제의를 주관하고 친목유지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영등포구 신길로에 위치한 신길도당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신길도당은 옛날 신길리 들 가운데 십자형의 강이 있고 그 강으로 인천, 김포, 한강을 거쳐 어선이 많이 왕래했다. 이에 어선의 무사와 풍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다는 전설 등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정확한 어원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신기리 주민들은 1591년 마을 어귀에 있던 소나무가 갑자기 쓰러져 불안에 떨었다. 그 후 1년 뒤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신기리 주민들은 소나무가 있던 그 자리에 도당을 짓고 도당할아버지, 도당할머니를 모셔 마을의 편안과 국태민안을 위해 정월, 칠월, 시월 세 차례에 걸쳐 도당제를 올렸다.

그러나 현재의 당집은 1949년에 건립되었으며 15년 전 3천만원을 들여 노후화된 당집을 새롭게 단장했다. 당시 신기리도당은 현판이 없었으며 현재의 ‘도당’ 현판은 이때 제작됐다.
신기리 향우회 권오상 회장(오른쪽 사진)은 본 기자와 만나 “매년 음력 10월 3일 신기리 향우회 회원 30명과 마을주민 등 100명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전했다.

현재 신기리 향우회는 “전체 회원은 34명으로 40대에서 70대까지의 남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월 회비는 2만원이다. 신규 회원은 도림초등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1년에 한 번씩 엄격한 심사를 거쳐 가입시킨다. 권오상 회장은 “젊은 사람들이 유교사상에 관심을 더 많이 가져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신길도당은 현재 도림초등학교 후문 바로 옆 담벼락에 붙어있으며 골목의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솟을대문이 있고 그 안에 6.6㎡ 정도의 한 칸 한옥으로 된 신기리도당이 있다.

권오상 회장에게 솟을대문에 태극무늬가 있다는 참고문헌의 내용을 알려주고 참고문헌과 다르게 왜 태극무늬가 없는지를 묻자 “15년 전에는 있었다. 당시 새롭게 단장하면서 태극무늬를 그려 넣지 않은 것 같다”며 “참고문헌은 15년 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도당 안에는 정면에 도당할아버지, 할머니를 그린 무신도가 봉안되어 있다. 그 앞에는 제물을 진설할 수 있는 단이 꾸며져 있다. 무신도는 도난당한 것을 다시 그려 봉안한 것이며, 왼쪽에 도당할아버지, 오른쪽에 도당할머니가 한 폭의 그림으로 함께 있다.
권오상 회장은 “이 무신도의 형상은 이태원부군당의 무신도와 형태가 닮아 동일시기에 동일 화상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하지 않다”고 말했다.

신기리도당의 상량문에는 단기 4279년(서기 1946)이라 적혀 있지만, 도당은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54년에 중건되었다. 도로 확장공사로 도당의 터가 반으로 줄었지만, 현재도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신기리도당제는 매년 음력 시월 초사흗날에 거행된다. 과거에는 정월 초사흗날과 칠월칠석날에 제를 지냈지만, 지금은 연 1회로 바뀌었다.

권 회장은 “제를 지낼 때는 수원, 김포, 인천 등 타지로 이사한 사람들도 잊지 않고 찾아와 참석한다”고 소개하고 제를 지내는 비용에 대한 물음에 “1회에 200여만 원으로 자치단체로부터 70만원을 지원받고 나머지 비용은 회비와 지역주민들의 후원으로 충당한다”고 답했다.

일제강점기 전까지는 무당이 굿을 주재하였다고 하지만 6·25전쟁 이후 유교식 제의만 거행한
다. 모든 치성을 주관하는 이는 당주로, 생기 복덕을 가려 선출하였다. 그러나 토착민들이 이주해 나가면서 당주를 할 사람이 없게 되자 신기리 향우회에서 1980년대부터 당주를 선출하여 소임을 맡고 있다.

제의는 당주 집에서 시작된다. 제물을 도당으로 옮기기 전에 간단히 당주 집에서 정성을 들인다. 삼색실과와 떡으로 제물을 차리고 절을 하는 정도이다. 도당으로 모든 제물을 옮기고 역시 신기리 향우회에서 선출한 집사의 도움을 받아 제의를 거행한다.

제물은 돼지머리가 올라가는 것을 제외하고 가정에서 거행하는 제사의 상차림과 같다. 제의방식도 일반적인 제사 격식을 따른다. 모든 제의가 끝나면 당 밖에 나와 축문을 사르고 음복을 한다.

영등포구 신길3동에 55여년을 살아오면서 신기리 향우회장과 도당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는 권오상 회장은 신기리 향우회 회원과 주민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지역을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유교적 풍토가 지속하여 주민이 모두 화합하는 신길 3동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밝은 미소를 보였다.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등록문화재는 1936년 건립 이래 건물 원형을 대부분 간직하고 있는 舊 경성방직 사무동(영중로 15)이 유일하다.

문화재는 고고학·선사학·역사학·문학·예술·과학·종교·민속·생활양식 등에서 문화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인류 문화 활동의 소산(所産)을 일컬으며 문화유산은 조상들의 문화 중에서 후손들에게 물려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한다.

영등포구의 산 역사를 담고 있는 문화유산으로는 신길도당을 포함해 상산전, 당산동 부군당, 방학곳지 부군당, 방학호나루터 표석이(서울시에서 세움) 있다.

이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로 문화재와 문화유산으로서 보존하여 후세에 남겨줄 수 있도록 영등포구의회 조례제정 등을 통해 영등포구 문화재로 지정, 보존할 방안이 검토되길 기대해본다.

4회에 걸친 취재에 협조를 아끼지 않은 권오상 신기리향우회 회장과 신길3동 운성미술학원 김부용 강사, 그리고 신길도당 인근 주민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신기리도당제 참고문헌과 신길도당 내력]

“신기리도당제는 마을 공동제의이지만 현재는 신기리 향우회가 모든 행사를 주관한다. 신기리향우회는 신기리 출신의 40대 이상 남자들로 구성된 단체로, 매달 10일 정기모임을 갖고 도당제를 주관한다. 마을 주민들의 참여는 거의 없이 오로지 향우회원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이것은 도시 지역의 전통마을이 붕괴하면서 전통 공동제의가 변모되는 새로운 모습으로 볼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나서지 않고 향우회, 보존회가 중심이 되어 공동제의를 전승하는 모습이 신기리도당제에 그대로 보인다.” -참고문헌 서울의 마을굿(박흥주, 서문당, 2001)


[신길도당 내력]
신길도당에 세워져 있는 표지판은 아래와 같이 신길도당의 내력을 소개하고 있다.
“도당은 관악산 낙맥 검지산 기슭으로써 경기도 시흥군 북면 신길리(현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 285번지)에 있다. 신길리 보존문화재로 맞배지붕의 벽돌조 한식 기와 건물로 년대 미상이나 약 380년 전 도당을 지어 주민들의 신앙영당으로 보존되어 오는 유일한 당이다.

당시 부둣가 언덕에는 굴참나무숲이 울창하였으며 그 옛날 신길리 들가운데로 십자강이라는 큰 강이 있었는데 그 강으로 인천 김포 한강을 경유하여 생선배가 많이 왕래하였으며 배의 무사와 풍어를 기원하기 위하여 필히 이곳에서 제를 지내고 무화안과를 기도하여 화를 피하고 복을 빌었다는 전설이 있어 이 동네 유지들은 신기리 향우회를 조직하여 당을 수리하고
매년 음력 10월초3일이면 온 마을주민이 참여하여 마을의 안녕과 질서는 물론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를 성심성의껏 드리는 곳이다.”

1997년 정축 10월 3일
신기리 향우회

박강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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