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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국의 비움 그리고 사랑]고 제정구 선생 추모제를 다녀와서 언제나 이 맘 때만 되면 항상 생각하고 다짐하게 되며, 그렇게 다져진 바를 금년 일년 동안의 자신의 좌우명이나 삶의 지표로 여기는 사건이 있다. 그날이 바로 오늘 고 제정구 선생 묘소참배이다.
14년째 참배하기 위하여 버스에 올라 지난 한 해 동안의 소식들과 안부를 물으며 묘소에 가서 무슨 인사를 할까, 무슨 가르침을 받게 될까를 생각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각자의 참배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나누기 위하여 서로에게 마이크를 권하게 되는 시간을 갖게 된다.
▲고 제정구 선생의 묘소참배. ©이민국
이러한 이야기들 중에는 그동안 전혀 몰랐던 고 제정구 선생의 우리가 생각하는 또는 전혀 다른 모습들의 이야기들도 듣게 된다. 대부분 신명자 여사의 이야기에서 많이 듣게 되는데 이번에도 법주사와 제정구 선생과의 특별한 인연을 이야기 하시면서 두분의 결혼생활이 한창일 때 제정구 선생을 아주 잃어 버릴수 있었던 곳이 법주사 였단다.
잠깐 소개하면 정일우 신부님과 함께 자주 전국의 산지를 찾아서 피정(속세를 떠나 기도와 수련으로 깨닮음을 얻기 위한 천주교회 의식적 행위)을 하게 됐는데 유난히도 법주사로 피정을 떠나는 날은 "나 이제 법주사에 가면 아주 못 올수도 있어" 라고 이야기하며 피정을 떠났고 신명자 여사는 그 이야기를 듣고 피정기간인 30일내내 진짜 안 오면 어쩌나하는 기다리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33일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날 오후 저녁 무렵에 산신령이 따로 없을 정도로 긴 수염과 남루한 모습 그 자체로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와 선생 제정구가 여러번의 피정을 했지만 이곳 법주사에서의 피정이 가장 값지고 높은 깨닳음 을 받은 것 같더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런 후로 정치일선에 나서서 스스로 걸레임을 자임하며 선생의 모든 행동들은 정치권 내에서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던 것이다.
제정구 선생은 사람으로 살면서 항상 구도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했으며 사람들의 일상적인 죄지음의 삶과 또한 사람들의 온갖 술수에서 꺼내주며 구제하려는 그분의 피나는 노력들은 이러한 단면적 삶에서도 엿 볼수 있었지 않을까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번 참배의 특징을 소개 하자면 평소에 제정구 선생과 함께 생활했던 사람들의 숫자는 현저히 줄었다. 지난해 까지만 해도 필자의 나이가 참배객들 중에 중간쯤이었으나 이제 윗자리에서 세는 것이 빠를 정도인 것이다. 그러나 참배객수는 오히려 지난해 보다도 더욱 많은 것 같다. 해마다 늘어나는 제정구 장학생들과 제정구 선생과 함께했던 사람들의 2세들이 자꾸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그중에 대표적인분이 박형규 목사님의 아드님인 박종열 목사님이 이번에 처음 참석 하셨다는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특히나 각종선거가 끝나고 정치인들이 무관심하게 지날 수도 있는 시기임에도 현직국회의원 유인태, 원혜영, 최원식 의원님들은 1박2일을 모두 함께 하였다. 여기에 한국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님의 명 강의와 법주사와 3년 산성 문화유산에 대한 설명이 정말 일품을 더 한 것 같다. 이러한 1박2일의 행사중 북한 자선사업 단체인 평화3000의 대표였던 한광식 전 대표의 말이 아주오래도록 기억에 남으며 꼭 그렇게 되리란 확신을 갖으며 끝을 맺으려 한다. 한광식 대표의 사모님이 암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하고 계신데 지난해에 두 내외가 제정구 선생 묘소에 함께 참배를 다녀간 후에 그 싯점에서 암 덩어리가 멈춰 버렸다는 것이다. 반드시 좋아지리라는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한 대표의 이러한 이야기에 누구랄 것도 없이 우리는 일제히 박수를 치며 꼭 그렇게 되기를 빌고 있었다. [편집부 주] 고 제정구 전 의원은 대표적인 빈민운동가 출신으로 제 14, 15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1999년 2월 9일 폐암으로 숨질 때까지 빈민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묘소는 경남 고성이다. 필자의 이 글은 경남 고성 추도식을 참석한 후 작성된 글이다.
이민국 새오름포럼 사무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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