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조 12년은 1466년, 1446년 명확한 오기(誤記)
  • 입력날짜 2015-12-23 11: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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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서 터 표석, 오기 수정되지 않은 채 2회에 걸쳐 이동
서울 시내 곳곳에 있는 표석은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대비해 설치되기 시작해 현재 총 219개가 있다.(10말 현재)

혜민서 터 표석은 이 중 하나로 1987년 서울 중구 을지로2가 건널목 앞 청계천 방향에 설치되었으며 2012년 12월 문안 수정 작업을 마쳤다.

서울시는 후속 사업으로 2014년 4월부터 혜민서 터 등 사라진 문화유산 터나 역사적 사건 현장에 세워지는 표석(標石)에 적용될 지침을 마련하고 177개의 표석에 오류(한자 이름 오기, 띄어쓰기, 서술 늘려 쓰기)가 있는 것으로 파악해 이를 새로 만들면서 바로잡아 나가기로 했다.

그러나 혜민서 터 표석은 오기 수정 없이 2015년 12월 을지로 2가 사거리 청계천 방향 건널목 앞에서 동대문 방향으로 10m쯤 옮기는 작업을 마쳤다.

현재 혜민서 터 표석 문구에는 “조선시대 서민 진료, 의약관리, 의녀 교습 등을 담당한 국립의료 기관인 혜민서가 있던 곳, 1446년(세조 12) 년에 설치되어 1882(고종 19) 년에 폐지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 주변의 민간 약재상과 약국이 모여 있었다”라고 표기되어있다.
옮기기전 청계천 방향에 서있던 혜민서 터 표지석(왼쪽_ 이전 후 동대문 방향에 서있는 혜민서 터 표지석(오른쪽)
옮기기전 청계천 방향에 서있던 혜민서 터 표지석(왼쪽_ 이전 후 동대문 방향에 서있는 혜민서 터 표지석(오른쪽)
 
그러나 혜민서 터 표석은 오기 수정 없이 2015년 12월 을지로 2가 사거리 청계천 방향 건널목 앞에서 동대문 방향으로 10m쯤 옮기는 작업을 마쳤다.

현재 혜민서 터 표석 문구에는 “조선시대 서민 진료, 의약관리, 의녀 교습 등을 담당한 국립의료 기관인 혜민서가 있던 곳, 1446년(세조 12) 년에 설치되어 1882(고종 19) 년에 폐지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 주변의 민간 약재상과 약국이 모여 있었다”라고 표기되어있다.

그러나 1446년(세조 12)은 1466(세조12) 년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서울시 관계자는 표석이 옮겨진 이유가 표석 앞 모 기업의 건물 신축으로 인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아니다”라고 잘라 말하고 “역사적 고증을 거쳐 혜민서 터 와 가까운 곳으로 옮겨진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12월 들어 혜민서 터 표석이 두 번씩 옮겨진 이유가 무엇이냐고 다시 묻자 “건물 공사를 하는 모 기업에서 작업을 진행했으며 이후 확인 절차를 거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겨졌다”라고 해명했다.

영등포시대 독자가 “서울시 관계부서에 민원을 넣었음에도 시정되지 않고 있다”라고 지적하고 취재를 요청해온 사실을 밝힌 후 혜민서 터에 오기가 수정되지 않고 옮겨진 사실을 알고 있는지를 묻자 “알고 있다. 시민의 민원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표석을 두 번씩 옮겨지는 과정을 거치면서도 오류를 정비하는 작업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은 점을 지적하자 “이달(12월)안에 재정비를 마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본 지는 현재 서울시 중구 홈페이지, 문화콘텐츠, 한국지역진흥재단 등 수많은 사이트와 자료집에 모두 잘못 표기되어 있었으며 잘못된 내용을 그대로 인용, 사용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서울시는 이번 기회에 이를 바로잡는 작업을 함께 진행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영등포구에는 서울 문화재 기념 표석으로는 유일하게 방학호나루 터 표석이 신길 1동 4901-1에 위치해 있으며 “이곳은 현재의 신길동에서 샛강을 지나 마포나루로 건너가기 위한 나루터였다. 조선시대에 도성 안으로 실어 가는 곡식을 찧는 방앗간이 있었기 때문에 '방앗곶이 나루터'라고도 불렸으며, 나무가 무성한 흰 모래사장과 언덕의 경치가 빼어나 학이 노는 호수 같다 하여 ‘방학호 나루터’라고도 불렸다”라고 적혀있다.

혜민서 터 표석 오기에 대한 취재는 서울시에 민원을 넣었던 영등포시대 독자 (김항서 문래동 대한비철금속 대표)의 제보로 진행되었다.

박강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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