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마•전 흔적을 찾을 길이 없는 사랑하는 아버님 전상서!
  • 입력날짜 2019-08-13 11: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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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다섯 살 때 아버지와 헤어진 남기필 님이 1939년 7월에 태어나 다섯 살이 되던 1943년 8월 일본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머나먼 타국에서 고인이 되신 아버님, 남달우 님께 전하지 못한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워지고 싶은 아버님, 아버님 살아계실 때 제대로 불러보지 못했던 아버님을 이렇게 편지로나마 불러봅니다.

아버님은 제가 5살이던 1944년 8월, 아버님께서는 어머니에게 3년 뒤에 꼭 돌아오실 거라는 말씀을 남기고 일본놈에게 끌려가신 뒤 다시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5살 이후로 제가 아버님 소식을 듣게 된 것은 1992년 대한적십자주관으로 사할린 동포 임시 방문 때였습니다. 당시 같이 징용으로 가셨던 남상후 대부님 만나 1944년 이후 아버님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남상후 대부님은 아버님의 생사를 묻는 저의 질문에 “이미 고인이 되신지 오래다”라면서 “당신이 직접 저희 아버님의 장례를 지낸 후 나무로 표식을 남겨 두었지만, 세월이 많이 흘러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아버님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는 말을 듣고 며칠을 울면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살아생전의 모습이 새겨진 아버님의 소중한 사진 한 장을 구했습니다. 잘 기억나지 않는 다섯 살 이후 아버님의 모습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남상후 대부님께서 전해주신 생전의 아버님은 탄광과 제지소에 나가 온갖 고초를 겪으시다가 해방 후 일본으로 돌아가는 배에 승선을 시도하셨다고 합니다. 그때 왜놈들이 조센징이 이 배에 왜 타려고 하느냐며 바닷속으로 밀어 넣었다고 들었습니다.

아버님은 당시 탄광과 제지소에서 강제 노역을 하면서 나빠진 폐로 바닷물이 들어가 피를 토하는 일이 잦았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한, 북한에서 파견된 공작원들이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고 어머님은 재혼했다며 아버님을 북한으로 데려가기 위해 회유했지만, 아버님께서는 속아 넘어가지 않고 꿋꿋하게 혼자 사셨다고 남상후 대부님께서 전해주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밤이나 낮이나 그리운 고향에 두고 온 처자식 생각에 병환이 날로 심해져 1965년 52세의 젊은 나이에 피를 토하며 돌아가셨습니다.

남상후 대부님께서 아버님의 위급한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갔지만, 대부님이 아버님의 거처에 도착했을 때는 아버님은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아버님은 일본의 강제 노역으로 나빠진 건강과 고향에 두고 온 처자식을 그리다 병환이 날로 심해져 1965년 52세의 젊은 나이에 피를 토하며 돌아가신 것입니다.

아버님, 천리타향에서 이토록 모진 고생을 겪으시다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전해 듣고 저는 분노와 슬픔을 이길 수 없어 몇 날 며칠을 울면서 보냈습니다.

찾아갈 수도 없고 불러도 대답 없는 아버님의 발자취를 그리며 생전에 아버님께 전하지 못한 말을 이렇게 전합니다. 아버님 그립습니다. 사랑합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아들 기필 올림

*남기필 님의 “차마 전하지 못한 말을 전합니다”는 다음 호로 이어집니다.
 

남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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