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학농민운동’인가? ‘동학농민혁명’인가?
  • 입력날짜 2012-09-24 08:5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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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발상지 표지석
동학농민혁명 발상지 표지석
 
역사 교과서에는 ‘동학농민혁명’이 아니라 ‘동학농민운동’으로 지칭되어 있으나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되었으므로 ‘동학농민운동’이 아니라 '동학농민혁명'으로 지칭되어야 한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 무장기포지, 전북 고창군 공음면
고창군은 동학농민혁명을 진두지휘한 녹주장군 전봉준 태생지이자 1894년 3월 20일, 동학농민 혁명의 출발지가 된 무장기포지가 있는 곳이다. 동학농민혁명은 1982년에 부임한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욕과 횡포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과 함께 봉기한 이른바 제1차 농민혁명이다.

현, 전북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은 동학농민혁명사에서 보국안민 정신을 최초로 천명하는 동학농민 혁명 포고문을 발표하고 조직적인 항쟁에 돌입하여 지역민란 수준에서 벗어나 전국적 혁명의 출발지로써 역사적 의미가 있는 무장기포지이다.
동학농민혁명 포고문 표지석
동학농민혁명 포고문 표지석
 
전국 최초로 동학농민혁명의 포고를 알린 공음면에는 1994년에 건립된 동학농민혁명발상지비와 무장의 포고비가 있으며 2002년 고창군에서 추가로 조성한 동학농민훈련장과 갑오 동학혁명의 제1차 봉기지로서 만천하에 동학농민혁명 포고문을 선포한 발상지의 상징인 동학혁명 기념탑이 세워져있다. 공음면이 이전에는 무장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무장기포지라고 알려져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에 시작되어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끝이 났다.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귀하다고 여기는 것은 인륜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로 시작하여 “함께 태평세월을 빌고 임금의 덕화를 누리게 되면 천만다행이겠노라.”로 끝나는 동학농민혁명 포고문 ‘전문’을 싣는다.
동학농민군 훈련장 표지석
동학농민군 훈련장 표지석
 
동학농민혁명 포고문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귀하다고 여기는 것은 인륜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부자는 인륜의 가장 큰 것이다. 人君이 어질고 신하가 곧으며 아비가 사랑하고 아들이 효도한 후에야 나라가 무강의 역(域)에 미쳐가는 것이다. 어질고 효성스럽고 자상하고 자애하며 정신이 밝아 총명하고 지혜가 있으니 현량하고 방정한 신하가 있어서 그 총명을 보좌한다면 堯舜의 덕화와 문경의 다스림을 가히 바랄 수 있으리라.

그러나 오늘의 신하된 자들은 보국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한갓 祿位만 도적질하여 총명을 가리고 아부와 아첨만을 일삼아 충성되이 간하는 말을 妖言이라 이르고 정직한 사람을 匪徒라 하여 안으로는 보국의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을 貪虐하는 관리가 많도다. 인민의 마음은 날로 변하여 생업을 즐길 수 없고 나아가 몸을 보존하는 계책이 없다. 학정이 날로 심하고 원성은 그치지 아니하니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명분은 무너지고 말았다.

管子가 말하기를 四維가 펴지지 못하면 나라가 멸망하고 만다고 했는데 오늘의 형세는 옛날보다 더욱 심하다. 公卿부터 方伯首領까지 모두 국가의 위태로움은 생각지 아니하고 한갓 자신을 살찌우는 것과 가문을 빛내는 데에만 급급하여 사람 선발하는 문을 돈벌이로 볼 뿐이며 응시의 장소를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으로 만들었다. 허다한 돈과 뇌물은 국고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개인의 배만 채우고 있다.

국가에는 누적된 빚이 있으나 갚을 생각은 아니하고 교만과 사치와 음란과 더러운 일만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니 8도는 魚肉이 되고 만인은 도탄에 빠졌다. 수재(守宰)의 탐학에 백성이 어이 곤궁치 아니하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근본이 쇠잔하면 나라도 망하는 것이다. 보국안민의 방책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밖으로는 향제(鄕第)를 설치하여 오로지 제 몸만을 위하고 부질없이 국록만을 도적질하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라 하겠는가.

우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이지만 임금의 토지를 부쳐먹고 임금의 못을 입고 사니 어찌 국가의 존망을 앉아서 보기만 하겠는가. 8도가 마음을 합하고 수많은 백성이 뜻을 모아 이제 의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사생의 맹세를 하노니 금일의 광경은 비록 놀랄만한 일이기는 하나 輕動하지 말고 각자 그 생업에 편안히 하여 함께 태평세월을 빌고 임금의 德化를 누리게 되면 천만 다행이겠노라.

서기 1894년 3월 20일.
호남창의소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동학농민혁명 기념탑
동학농민혁명 기념탑
 
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의 의미
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의 전체적인 모형은 농민혁명의 강렬한 의지와 열성의 횃불을 형상화 하였고 중앙 부조 조각은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대의를 위해 만방에 봉기할 것을 호소하고 포고문 선포의 역사적인 모습을 표현하여 그 당시의 역동적인 모습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주위에 배치한 죽창은 그 때 농민군이 사용한 무기로써 분연히 떨쳐 일어섬을 나타냈으며 혁명의 참뜻을 기리고 자손만대에 그 교훈을 널리 기리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건립하였다. (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의 의미, 정보 고창군청)

박성철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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